저 새끼는 어떻게 살아있는거지?

1930년대생 어르신들을 만날 일이 생겼다.

오늘 처음 자리를 가졌고, 내 딴에는 그 분들께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구성지게 펼쳐주시지 않으실까 기대도 했으나 기대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단답형으로 이야기가 끊어지기 일쑤고 가장 연세가 많으신 구순의 할머니는 한맺힌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1930년대.

이 분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일본제국은 곤고했다.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국가나 민족에 대한 의식이나 개념이 생기기 전에 일본이름이 주어졌다. 학교에 가면 일본어를 배웠으며 일본선생에게 일본노래를 배웠다. 불과 여섯 살, 일곱 살, 많아봐야 열 살인 아이들에게 왜 일본이름을 썼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1930년대생, 그들의 부모들은 190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일제침략을 직접 목도한 세대일 것이다. 그들이 새파랗게 두 눈을 뜨고 국권이 침탈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한 백성의 한 사람으로 나라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내부가 얼마나 썩어들어갔는지 이미 다 체감하지 않았을까.

한 국가가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것은, 강력한 무력과 고도의 심리전이 같이 동반된다 하더라도, 어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분명히 존재했으리라. 물샐 틈이 없는 집구석에 도적이 들어오진 않으니. 어쩌면 일제시대의 개막을 환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점령을 환영한 자가 과연 친일이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폭압과 차별에 대한 반감으로 어찌됬건 무엇이 됬건 “새로운 것”이 도래하길 기다리지 않았을까 말이다. 물론 친일의 문제는, 폭력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동조했다는 점이 크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 정치적으로 독립을 주창하고 굳게 맞서 싸웠어야 하는 것은 국가구조를 지켜내는 명목으로 녹을 먹는 자들이지, 논밭에서 뒹굴고 해지면 피곤해 곯아 떨어지는 백성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30년대생.

이 분들은 자연스럽게 일본학교를 다니고, 국가와 민족의 사전적 정의를 알게 될 때쯤에 해방을 맞이 하게 된다. 그리고 신속하게 퍼져나가는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1945년 8월에,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 것인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배웠던 일본어와 불과 20년이 안되는 세월동안 정겹게 써오던 두 개의 이름들, 그 중의 하나를 처참하게 밟아버리고 정들었던 일본인 선생과 이웃들이 (모든 일본인 개개인이 제국주의인 것은 아니므로) 있었다 한들 모두를 부정해야 하는 역동의 순간을 맞이했을 것이다. 매일 보고 다녔던 일장기를 불태우고 저들은 모두가 다 악마와 같은 것들이라고 한 순간에 세상이 뒤집혔을 때, 10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태평성대에도 자기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던 순간,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개념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이들은 문맹이 된다.

배운 것은 일본어요, 썼다가 불이익을 당한 것은 조선어였으니, 그들이 조선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돌아왔을 때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이리저리 흔들렸고, 곧 전쟁이 터져 피란을 가거나 숨어 지내거나 전쟁터에 나가거나 살아 있기 위한 시간을 지낸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무렵, 피폐해졌거나, 혹은 무기력해진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세상에서 잘 살아나가기 위해 부지런히 벌어, 먹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악착같이 조선말을 다시 익히고 갈고 닦고 학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20세기만 그랬던가, 그 때 동아시아만 그랬는가.

인간은 그저 큰 물결에 휩쓸려 흘러 흘러 떠내려 간다. 그 중에 누가 더 근력이 좋아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끌어안는지, 그 통나무 위에 떠내려가는 누구를 건져 올리는지, 어떤 사람은 떠내려 가는 돼지를 실어 올릴 수도 있고 거센 물살 속에서도 실속 차리는 인간은 분명히 존재하고 힘에 부쳐 물밑으로 가라앉는 자도 있다.

물길은 끝없이 흐르고 우리는 언제 헤엄을 치고 언제 고개를 들며 언제 숨을 쉴 것인가 결정하며 떠내려 간다.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할 것인가, 같이 죽기를 불사할 것인가 말이다.

소용돌이 치는 물결, 아래는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흙탕물속에서 끝없이 내몰리고 휘몰아치는 일. 그런 자아들이 모여, 타인은 과연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 지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한반도가 3면이 바다인데, 그 모든 바다를 포기하는 순간, 한반도의 모든 인간은 중앙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고. 모두가 사대문안에 모여, 다른 놈은 어떻게 담을 타고 오르는가,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어떤 집단도 정당한 제도를 만들어 번호표를 끊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다 알게 되는 정서의 출발.

그건 바로 “저새끼는 어떻게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는거지?” 라는 끊임없는 생존의 위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2013. 5. 20.

일본극우주의자들의 망언 및, 일베충 광주모독 때매 매우 속이 시끄러운 2013년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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