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밤 이야기

1.

딴따라나 재주꾼이나
그가 사는 곳, 그가 머무는 자리가 바로 작업실이고 무대다.
어디에 가면 화양연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바닥을 치는 자존감의 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산이 좋지 않으면 저 산도 좋지 않다.

2.
할머니는 언제나 오만가지 재주 있는 년이 밥굶는다 했다. 오만가지 재주 중에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3.
한 밤의 도로엔 바스러진 유리조각과 신속히 달리는 렉카차가 있다. 멍하니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과 이 나라의 척박함에 진절머리 내는 청춘이 있다. 그래도 내일은 낫지 않을까 하고 믿어보고 싶지만 대부분의 내일은 어제와 비슷했다. 그저 그 중에 맘에 들었던 어제를 꼼꼼히 복기하고 재현하는 일로 내일과 모레를 채워보는 것이다.

4.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저 듣는 자들이 있다. 세상에 수없이 넘쳐나는 문자들이 나무를 베어낸 종이로 책이 되어 팔린다.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가. 초대형 서점에 서서 수없이 많은 무명씨들의 감정의 배설물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나 역시 어딘가에 끊임없이 싸지르고 있다.

5.
도시는 끊임없는 배설의 공간.
사람들은 악귀같이 꾸역꾸역 욕망을 먹고 짐승보다 격하게 싸지르며 밤을 탕진한다. 멍하니 있는 시간은 비생산적이고 스스로를 컨베이어벨트에 올린 채 끼륵끼륵 기어간다. 욕하고 째려보고 분노를 배설하여 허기지면 위산과다를 못 참고 또 꾸역꾸역 음식을 마신다. 모두 나와 같이.

6.
태생이 그런 것을 어쩔 수 없다는 섭리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신들은 광폭한 절대 권력을 가졌다. 호메로스가 음모론의 기초라는 얘기를 들었다. 오이디푸스의 재앙은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는 말이 있다.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절대 선이 아닌 이유가 그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잘나고 용맹했다. 그게 그를 망쳤다. 공자의 知天命과 오이디푸스의 저주는 닮아있다. 그리스의 난잡한 신들은 지금의 재벌과 권력자의 모티브다. 인간이 사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 가장 현명한가. 그 답에 적어도 한 발은 가까워진 거 같기도 하다.

7.
움베르트 에코는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은행원이 되어서라도 파리에 살고 싶다” 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을 열 번쯤 곱씹어 본다.
은행원이 그닥 나쁜 직업 같지도 않다. 수많은 군상을 관찰하고 퇴근은 제 시간에 할 테니까.

8.
더럽게 피곤한 밤이 깊어간다.
적어도 내게 삶은 언제나 치열해야만 했고 그래서 그게 정당했다.
그렇지 않게 살던 시절이 가장 괴로운 나날이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늘 조금은 부족하고 외로워야 행복했다.
문 닫기 직전의 마지막 손님으로 앉은 라면집에서 추위에 김이 서려 허얘진 안경을 내려 놓고 있자 그니가 말했다.
“너 중국에 있을 때, 안경 바꿔야 되는데 돈이 없다고 했었잖아. 진짜 불쌍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돗수가 안 맞아 눈이 피곤해도 아마 나는 행복했던 기억만 남긴 게 분명하다. 그 때는 가난했고 조금 외로웠다.
오이디푸스의 저주와 공자의 知天命 과 그리스 신들의 교만한 장난질이 안경에 서린 김 같았다.

– 어느 졸라리 추운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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