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의 정체성

옛부터 큰 일을 준비하거나 마음의 큰 결심을 할 때 조상의 묘를 찾아가 예를 갖추는,
그런 게 있었는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거 같았다.
(있었것지..어디서 주워드었것지)

그래 어제, 큰 결심을 하고 어머님과, 할머니의 묘를 찾아 인사를 했다.
조상을 찾고 어쩌고 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뿌리를 찾고 조상을 따지고 묘를 쓰고 하는 것은 정체성을 명확히 찾으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간은 없다.
내 안에 흐르는 피와 유전자, 그 정서의 모든 것들이 바로 다 위에서 내려온 것이다. 그들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 뭐 이런 충효주의 사상 말고.

사람이 성장기에 부모와 선대로부터 들어온 집안의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엔 자기 인생의 단서와, 성격과 기질의 단초가 될 열쇠들이 들어 있다.

물려받은 유전자는 존재하고, 그 중에 유달히 강한 부분이 있고 약한 부분이 있다. (강/약의 얘기는, 좋다 나쁘다의 평가가 아니다) 그런 물려받은 부분은 서른쯤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그 때부터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일이 생긴다.

물론 예전엔 훨씬 더 일찍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기들 시작했지만, 지금은 학교를 지나치게 오래 다니는 까닭에 모든 것이 늦어졌다. 물론 인간 수명의 연장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 수명이 40-50세 사이였을 때, 공자가 말한 이립(而立)이 스물이었다면, 지금은 그 수명이 연장된 만큼, 인간수명의 반절쯤에서 두번째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른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각종 심리학 서적들이 난립한다.
그 심리학 서적들은 세상을 원망하지 말고 너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네 마음의 문제가 있다, 네 마음을 다스려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30년간 해보지 않은 일을 15,000원짜리 책 몇 권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이미 어색해진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거나, 모든 것을 참아드릴테니 어디 한 번 우리집안의 흑역사를 말해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부부간의 불화로 동거중이거나 아니거나, 양육자가 자녀에게 자녀의 뿌리를 조곤조곤 이야기 해주지 않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너에겐 이만한 역사가 있다. 너에겐 이만큼 많은 너의 혈육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모여 너를 만들었고, 너는 그래서 소중하다 라는 메세지가 은연중에 전달된다.

지금 서점에서 “서른살 징징징”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바로 이 세대들은 급격한 산업화와 물질의 갑작스러운 홍수로 그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많이 잃었다. 그래서 그들은 헤매인다. 나는 누구인가. 사춘기때 하지 못한 숙제를 이제서 하고 있다. 마음은 아직도 열두살, 애니어그램, MBTI, 진로상담. 그런 것들로 자기들의 규격을 알고자 한다. 사람에게 규격은 없다. 모두 역사와 역사속에 살아 있을 뿐.

한 인간의 정체성이 생로병사와 가족의 의례로 명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사실 얼마 전이다.
그렇게 두 달 전에 가신 어머님께 다녀왔다.
그리고 30여년전 돌아가신 할머니에게도 다녀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울었고, 웃었고, 다짐을 되새겼다.

만일 나에게 새털만큼의 권력이라도 주어진다면, 그 권력을 가볍게 놓아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겠다고.
그리고 사람이 되겠다고. 참사람이 되겠다고. 감정으로 타인을 대하지 않고, 늘 깨어 있겠다고.
그리고 자유롭겠다고. 자유롭기 위해 힘을 갖고, 자유롭기 위해 돈을 갖고, 자유롭기 위해 지혜를 갖겠다고.
욕심내지 않고 내가 배운 모든 것을 나누며 가겠다고.
세상 사는 동안, 세상은 나에게 쌀 한 톨 보태주지 않았다고 했던 그 말 거짓말이었다고.
이제 깨달았다고.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고. 그걸 돌려주겠다고. 모두 다.
나보다 못배운 자, 나보다 가난한 자, 나보다 슬픈 자, 그들에게 나누겠다고.
다시는, 당신들을 먼저 만나러 가지 않겠다고. 잘 살아서 웃으며 그 강을 건너겠다고.

파란 하늘의 어머님 산소에서부터 노을지는 할머니 무덤곁에서.
나는 아주 인간답고 인간다운 결심을 그 분들 비석 앞에서 보이지 않게 깊게 새겨넣고 왔다.

孺子金海金氏五任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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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李公基東, 漢陽趙氏香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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