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소수자, 인권, 도가니 그리고 나.

관련기사 1. 뷰스앤뉴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9174

관련기사 2.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81009321&code=910100

관련기사 3. 모닝뉴스

http://www.morningnews.co.kr/read.php3?no=40672&read_temp=20110928&section=2

관련기사 4.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84848

관련기사 5. 노컷뉴스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27921

관련기사 6. 에이블뉴스

http://www.ablenews.co.kr/News/Include/NewsContentInc.aspx?CategoryCode=0013&NewsCode=001320110928173422991500






위에 링크한 기사 6개는 모두 이번 나경원 의원의 장애아동 알몸목욕에 대한 기사와 그에 부연되는 설명들이다. 
상위에 링크한 기사는 비교적 객관적이라 링크했고 4번에 건 오마이뉴스 기사는 지난 번 대선 때 정동영후보가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 것에 대한 지난 기사다. 


사람들은 빨리 잊는다. 
지난 대선 때 반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고 싶었으나 정동영후보측의 여러가지 행보가 맘에 들지 않아 마음을 접은 적이 있다. 그 사유중에 하나가 아마 나도 잊었던 위의 사유도 작용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당시 한나라당에선 맹비난을 퍼부었고 현재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변명 외에 다른 입장표명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 포스팅을 작성하기로 결심한 사유는 바로 아래 사진 때문이다. 
촬영현장은 바로 이와 같았고 미리 세트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위 기사의 내용대로 나경원측은 가브리엘의 집 측에서 미리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 가브리엘의 집 측에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던 것 같다. 






사람이 어떤 동일한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익숙해진다. 
마치 쓰레기냄새를 계속 맡고 있으면 후각이 마비되어 금방 불쾌감을 잊듯이, 사람에겐 망각이라는 특별한 도구가 있어, 세상을 살아가는데 보탬이 되기도 한다. 


늘 두들겨 맞는 사람은 그 환경이 학습된다. 전문용어로 학습된 무기력이라 칭한다. 
늘 무시당하고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늘 손가락질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은 원래부터 이래왔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늘 보고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학습된 무기력은 전염된다. 
저 인생은 원래 저런 인생이니까. 그래도 전화위복이라, 새옹지마라 믿고 뭐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한다. 


아마, 장애아동의 엄마이기도 한 나경원의원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학재벌의 딸로, 엘리트 코스를 거쳐, 판사를 한 아리따운 미모의 여성이, 장애아동을 낳았을 때, 그래 이것도 전화위복, 하늘이 주신 삶의 체험이라고 값지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엘리트 코스를 밟아 긍정적 마인드를 가진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잘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일 수도” 있다. 


긍정의 함정은 여기에 있다. 
자 나에게 닥친 이 난관을 “기회로 만.들.자” 라고 하는 사고방식. 
기회로 밟고 올라가는 순간 위험해진다. 
전화위복을 활용하려는 물적대상으로 봤을 때 함정에 빠진다. 


한국장애인부모회후원회의 공동대표이기까지 한 나경원후보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겸허히 받아들이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판에 뛰어드니 그 무게를 활용하라는 사람들의 전도에 고무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건 너에게 힘든 일이지만, 이게 너의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누군가 그녀를 꼬드겼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파우스트는 나약한 인간이라 죄가 있고 메피스토텔레스가 사악한 사탄이라 더욱 나쁘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악한 유혹에 휘리릭 넘어간 파우스트는 비록 많은 것을 가졌으며 엄청난 지식을 지녔더라도, 신념이 없었다. 
늘 갈등하고 우유부단하고 욕망에 시달렸던 파우스트는 덥석. 메피스토텔레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와 쌍둥이 같은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 둘의 조화는 그저 가면을 쓰고 안 쓰고의 문제이다. 
대놓고 나쁜 짓을 하느냐, 가면을 쓰고 나쁜 짓을 뒤에서 몰래 하느냐의 문제. 
저질러 놓고 그래놓고 몰랐어요. 내가 죽일 놈이야 나는 왜 이럴까. 해봤자 이미 결과는 벌어진 것인데 자신의 양심과 신념이 철저하지 못해 그 유혹에 넘어간 것은 말하지 않고 누군가 나를 꼬드겨서, 긍정이 나를 꼬드겨서, 내가 잘못 생각을 해서, 순간 실수를 해서. 라고. 나는 인간이니까요. 라고 역설하는 셈이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과 감성을 지녔으나, 가장 숭고할 수도 있는 개체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살지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라고. 말하며 웃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무뎌진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은 고금의 진리다.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아주 돌덩이 같아진다. 
그리고 그 면이 점점 반질반질해지기 시작한다. 양심따위는 미끄러져 사라진다. 
모두들 아큐가 되어 정신승리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노신을 몰라도 상관없고 아큐정전을 읽고 아큐의 정신승리법에 대한 비평을 전혀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건 자생적으로 아무리 학식이 짧고 지적능력이 떨어져도 거둘 수 있는 매우 쉬운 논리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망가져간다. 


공지영의 도가니가 영화화되고, 공유와 정유미의 주연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소설이 사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실제 주인공들이 살아있으며 처벌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도 못한 아이들을 유린한 극악무도한 교직원은 6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징역형을 산 건 2명뿐입니다.
나머지 2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나머지 2명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와 피해자 부모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전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_KBS 뉴스보도 멘트일부 

자 이런 식이다. 


아동성범죄에 대한 처벌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지만 아직 우리는 체감하지 못했다.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는 서명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언제 입법화 될 지 모른다. 
아동성범죄의 공소시효는 분명히 폐지되어야 하는데, 저항력이 없는 아이들이 유아기나 청소년기에 당한 일을 그 때 당시엔 사실 그게 무슨 일인지도 몰랐다가 나중에 성인이 되어 그게 성폭행이었고 그게 성추행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성인이 되어, 심지어 부모가 되어, 나 이제, 그 때 그게 성폭행/성추행이었다는 걸 알았어. 라고 고백하는 얘기들을 간간히 듣는다. 


그런데, 아동성범죄를 역겹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이 나라에선 버젓이 미성년자들이 나를 유혹해봐, 혹은 너를 유혹해줄께 라는 뜻의 노래를 부르며 엉덩이를 흔든다. 동안이세요. 라는 말에 담긴 젊음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젊고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순수한 의미로 들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변형된 롤리타 신드롬이 조금씩 반영되는 것은 아닌가. 왜 원조교제가 판을 치는 나라가 되었는가, 언제부터 사람을 영계라는 호칭으로 싸잡아 부르게 되었는가, 왜 이나라 사람들은 젊은 것에 대해 갈망하는가. 아니 그게 비단 이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 인류의 문제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특별히 이 나라는 매우 인간관계가 권력중심적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나이를 중시하고 혈연,지연,학연이 중심이 되며 어디를 가든 리더, 즉 대가리와 어른이 존재해야 한다. 
예의를 지키고 장유유서라는 유교적 율법을 기초로 삼는 국민정서상, 너 몇살이야? 라는 얘기가 싸움판에 빠지지 않는 나라. 
그리하여, 오빠. 라는 단어에 열광하는 남자들과 오빠. 라고 불러주면 좋아한다는 걸 다 알고 있는 여자들. 
환갑이 되도 듣고 싶은 단어는 “오빠” 라는 것은 남성연장자와 여성연하자의 연애구조가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통념이 되어 있는 나라, 그래서 선풍적 인기를 끈 아이유의 노래 가사 중 “나는요, 오빠가 좋은 걸”에 수많은 남자들이 맥없이 부질없이 쓰러지고 마는 나라. 


그래 나이 어린 여자는, 귀엽고 예쁘고 젊고 상큼하기도 하지만 일단 나이로 밀어부쳐 고분고분하게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떤 환타지가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실상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적지 않게 시작되고 있으나, 사실 까놓고 
“어허..어린게 오빠한테 까불어?” 이런 문장 하나로 상대방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정서가 이 나라엔 숨어 있지 않나?
물론 요즘에야 “오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미친새끼” 라는 반발과 함께 정강이를 까일 수도 있는 현실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판타지적으로 그런 정서가 바탕에 깔려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이가 권력이 되는 나라에서 연하의 여성은 매우 이상적인 연애의 대상이며 이에 발전해 성욕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선 비일비재하게 정서적 결함과 뇌질환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무수한 아이들이 고통을 받고 평생을 지옥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무에 못질을 하고 못을 빼낸다고 그 구멍이 메꿔지는 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어린 아이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빤스 밑으로 10cm 정도밖에 안되는 치마를 끌어내리며 가는 걸 보면 심란하다. 
본인도 신경이 쓰이는 길이, 무엇이 저 아이에게 저 치마를 입게 만들었나. 
무엇이 저 아이에게 치마를 줄이게 했나. 
치마가 길면 바보취급 받는 이 나라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어른들이 소위 예능이라고 말하는 오락프로에 나와 궁둥이를 흔들며 현란한 춤을 추는 어린 여자들을 보며 박수치고 잘한다고 칭찬해줄 때, 그 문화가 전체적으로 이 세상을 지배할 때, 아이들은 치마가 짧아야 살아남는 이상한 세상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나경원 의원의 이번 행보가 흥행중인 영화 도가니에 맞물려, 사학재벌의 딸, 그녀가 앞장서서 반대해서 사학법 개정이 통과되지 못했다, 라는 의견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매우 곤란한 시기에 본색이 드러난 것일까. 


누군간 이렇게 쉽게 말할 것이다. “때가 좋지 않다’ 라고. 


카드놀이를 하자고 졸라대는 나의 어린 아이를 보며, 
나는 얼마나 이 아이의 인권을 지켜주었는가 생각한다. 
나는 늘 아이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가, 나는 얼마나 아이의 인권을 지켜주는 엄마였던가. 
아이를 욕되게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기는 것처럼 모욕을 주지 않았던가. 
분명히, 나 역시, 그랬던 순간이 내가 스스로 부끄러워 지워버린 기억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나는 쉽게 흥분하고 아이를 잘 야단치는 그런 사람이니까. 
분명히 그렇게 아이를 절벽위에서 떠미는 것처럼 아주 초라하게 만든 적이 있었을 것이다. 


남의 아이에겐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내 아이에겐 당연한 듯이 말이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말은 바로 이런 상황에 쓰는 말 “내 자식 같아서요” 라는 말이다. 
남의 자식 앞에서 깍듯하고 내 자식앞에서 안하무인인 부모의 말을 듣는 것 같아서 
나는 언젠가부터 “내 자식 같아서요” 나 “가족같이 일합시다” 라는 말을 들으면 막 대하겠다 라는  뜻으로 들린다. 




분명 이번 나경원후보의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 맞다.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고 후보와 관련기관은 사과하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 
장애아동의 어머니라는 것을 공포하고 더 잘 안다고 떠벌였으면 소수인권을 지켜줘야 마땅하지 않은가. 
촬영팀이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더라도 자신이 문을 닫았어야 하지 않는가. 
장애아동은 사춘기가 없는가? 장애아동은 예민한 시기가 없는가?
12살에 발가벗겨져 문짝도 없는 오픈된 공간에서 목욕을 해야만 했던 아이의 마음을 당신은 아는가?


가끔 자원봉사자를 구하는 문구중엔 “목욕하고 싶어요” 라는 사연이 있다. 
자기 몸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처연한 이야기다. 
수단화 하지 말라. 
분노가 치밀어 쌍욕이 나올 뿐이다. 


나후보가 장애아동이고 그 곱디 고운 얼굴 때문에 발탁이 되어
12살 나이에 서울시장 후보인 이성의 남성후보에게 발가벗겨진 채 카메라 앞에서 목욕을 해야 했다면
당신은, 그 후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을 것인가 복수의 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 아닌가?


문제는 후보측만이 아니고 소수자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혹은 소수자를 자주 대하기 때문에 무뎌진 양심들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게다가 그를 비난함과 동시에, 나는 얼마나 누군가의 인권을, 옷입고 가꿔진 모습을 지켜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가. 
돌아볼 일이다. 


한 장의 보도사진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이제 이 글을 마쳐야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제발 뉴스를 보며 피가 거꾸로 솟구쳐 애먼 내 시간을 분노를 삭이는 데 쓰지 않는 세상은 과연 오지 않는 걸까. 
절망스럽다. 


2011.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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