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우어파우스트 – 명동예술극장 공연

<10월 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이어질
우어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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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디비 관련정보
우어파우스트는 쉽게 말해 괴테의 파우스트의 초고이다. 
그렇다고 이 초고를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고 보긴 어렵다. 
약간은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연출을 가미한 명동예술극장의 우어파우스트는 독일연출가 50인중 한 명인 다비드 뵈쉬가 연출을 했다. 해외연출가를 초청해 공연을 만들어 보자는 계획중에 우연히 인연이 닿아 젊고 실험적인 연출을 하는 다비드 뵈쉬가 그 적임자가 되었다고 한다. 
TV에서 낯이 익은 정보석씨가 출연해 대중적 흥미가 더할 수 있겠다. 
이 연극은 정통연출기법과는 상이한, 게다가 약간은 그로테스크하여 보는 이가 거북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했을 것이다. 
실험적 예술적 연극을 한답시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연극의 3대 요소중의 하나인 관객이 빠져버리는 일이므로. 
게다가 이 연극엔 중간중간 소극장 공연처럼 관객과의 소통도 (매우 미미한 양이지만) 대본에 속해있다. 
연극의 규모에 비해, 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신(神)을 맡은 정규수 (올해 명동예술극장에서 가장 자주 만난 배우인듯), 파우스트 박사에 정보석, 메피스토텔레스의 이남희, 그레트헨의 정지아, 그레트헨의 오빠 역의 윤대열, 꽃님이로 변질된 학생역의 김준호. 
그리고 이 극의 주인공 중 한 명은 바로 무대다. 
약간 시선이 분산된 듯한 느낌의 무대 왼쪽엔 그레트헨의 초라한 생활을 나타내는 세면대가 있다. 그것이 그레트헨과 발렌텐의 공간 전부이며, 가운데 부분은 곡선의 빗사면으로 되어 있는 벽이 뒤에 펼쳐져 있다. 올라갈 수 있을 듯이 보이나 오르기가 힘겨운 그 어떤 추상적 이미지를 무대로 표현했으며 모두 검은색 일색이다. 

파우스트의 내용은 잘 알려진 바, 이 극에서 주의할만한 특이점들만 이야기 하려고 한다.
파우스트는 모든 것을 가진 지식인, 그러나 인간의 무능함에 답답함을 느끼는 자이나, 뚜렷하게 고고하거나 숭고한 인물은 아니다. 그리하여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을 맺고 때론 그를 조정하고 때론 그를 압박하고 때론 그에게 이끌려 다닌다.

메피스토텔레스는 성서에서 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비열한 악마의 모습이 아니라 매우 저돌적이고 지능적이고 파괴적이며 우월한 존재다.
타인을 정복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는 능력이 뛰어난 캐릭터로 묘사되었다.
또한 매우 추접스러우며, 성적 욕구에 대한 묘사가 많았다.
불편함을 느낀 관객들도 있을 법한데, 식욕과 수면욕이 나름대로 존중받아 마땅한 것으로 당연시 된다면 성욕은 사람들이 매우 노출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대식욕이나 과대수면욕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그러우나 과대성욕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이 극의 메피스토텔레스가 표현하는 과대성욕은 거침이 없다.
단순히 성욕으로만 표현된 것 같겠지만, 메피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성욕은 그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의 총체적 집합이다.

파우스트는 무료한 일상에서 그레트헨을 마주치고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거나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싶다가 아니고 오늘 밤 당장 품에 안고 싶다. 라는 감정이다.
누군가 사랑은 사랑으로 포장된 성적욕구에 불구하다고 했던가.
거침없는 파우스트의 욕구는 왜곡되어 그레트헨에겐 사랑으로 여겨진다.

또한 파우스트의 욕구가 그레트헨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레트헨은 물욕으로 인해 사랑을 확인한다. 사랑이라고 이름지어지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성욕, 그 성욕을 채우기 위해 전달되는 선물공세로 여성의 물욕을 충족시키고 상호 욕구를 충족하는 그런 단계로 표현한 것이다.

(일부에선 여성비하, 여성혐오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저 남녀의 성별의 상징적 의미를 과하게 곡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역사에서 기록하는 여성성을 이토록 유혹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유전학에서 말하듯이, 여성만이 출산을 할 수 있고 여성만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기 때문에 남성의 동물적 본능, 존재를 남기고 후손을 생성하고 싶은 (혹은 그 후손을 생성하는 것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함이라면)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오로지 여성의 자궁이 필요하다. 남성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역사이전에 모계사회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역사가 기록된 이후엔 대부분 남성중심으로 세계역사가 재편되었고 그것들이 증거로 남아있다.
결코 남성이 초월할 수 없는 경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면, 인간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가 남성의 시각에서는 오로지 여성이다. 남성은 여성을 차지하고 그로 인해 욕구를 충족해야만 생명의 의미를 갖는다.

자식을 낳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교육과 양육의 책임이 더 커졌으나 역사적으로는 자식을 낳는 것은 자신의 영역과 유전자를 확대하는 의미가 더 크다. 물질이 부족하던 시절엔, 자손을 퍼뜨림으로써 왕국을 이룰 수 있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하여, 
파우스트 박사는 성적욕구와 물적 욕구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그레트헨을 차지하나, 그레트헨은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으로 잠시 물적 욕구에 흔들려 파우스트를 사랑한다고 믿지만, (그것도 하인리히라는 가짜 이름을 믿는 것) 애초에 욕구로 시작한 것이 사랑으로 돌변하긴 어려운 것. 
그레트헨을 만나기 전, 
메피스토텔레스가 파우스트박사를 찾아온 성공의 욕망에 불타오르는 한 청년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명성이 자자한 파우스트의 오른쪽에 앉겠느냐는 메피스토텔레스의 사기에 당해버린 농락당한 학생은 그 욕구 때문에 족쇄를 대신해 바지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하게 된다. 
개의 상징은 언제나 그렇듯. 
개같은 것. 
자,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에게 유혹당하고 그에게 버림받고
이제 그의 오빠 발렌틴의 모욕이 기다린다. 
발렌틴은 지고지순한 누이에 대한 욕구로 그레트헨을 모욕한다. 
이 역시, 욕구다. 인간의 욕구, 뭔가 되고자 하는 욕구, 무엇으로 남고자 하는 욕구,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 아 욕구 욕구 욕구. 
이렇게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는 쌍둥이 같은 모습을 보이거나 서로 거울처럼 반영되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데,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사실 파우스트가 숭고한 인격체 자체가 안되므로, 그 안에 내면적으로 잠재해 있는 한 인간의 악마성에 대해서 표현한다. 
신은 극중에서 내내 무력하다. 
심지어 잘 걷지도 못한다. 초반에 메피스토- 를 외쳐 부를 뿐, 아무 역할을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세계가 존재하고 그가 순간,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장면이 있다. 

후반부로 치달아, 그레트헨이 완전히 파괴되기 직전,
메피스토텔레스의 악마성의 최고조에 다르는 장면이 펼쳐진다.

메피스토텔레스는 높은 곳에 올라, 꽃님이를 옆에 호위무사처럼 인형처럼 앉혀놓고 마이크를 잡고 목사나 신부가 입을 법한 예복을 입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들고 그레트헨을 단죄하기 시작하는데 이 장면이 흡사,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우리가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 강대상위의 그분들의 단죄장면이다.

너는, 죄인이고 너는 더럽혀졌으며 너는 원죄가 있어 벌을 받아 마땅하니.
현실의 목회자들은 구원받을 지어다, 라고 하겠지만 메피스토텔레스는 너는 파멸을 면치 못하리라고 저주한다.

현실과 극의 완벽한 오버랩.
연극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서준식의 옥중서간을 읽으며 그가 느낀 예수의 모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신은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 존재하였던가.
그분은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용서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 아니었던가.
대체 누가 인간을 단죄하고 인간에게 죄를 물으며 인간에게 죄사함을 받기위해 종교기관에 충성하라고 말하더란 말인가.

(게다가 이 연극을 보고 온 날 PD수첩에서 기독교의 부정축재에 대한 꼭지를 내보냈다)

신은 그레트헨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 위해 눈을 뿌려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 하지만, 결국 그레트헨은 미치광이가 되어버리고 파우스트는 또 다르게 시작한 아주 가벼운 작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레트헨을 떠나버린다.

욕구로 시작하여 욕구로 끝나는 우어파우스트.
현대적 영상과 현대적 음악, 그리고 매우 절도 있고 깔끔한 구성이 조금 낯설 수 있으나 복잡다단한 인간의 총체력 무력함과 선악을 표현하려는 괴테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 매우 아쉬웠던 것은,
내 뒤에 영화계 원로분들이 앉으셨는데, 이 나라의 거목이신 김모감독님과 그 옆에 계신 분께서 연극을 보는 내내 관전평을 해대셔서 극몰입에 엄청난 괴로움을 겪었다.
내 뒷줄에서 서너자리 오른편이 앉으셨는데 바로 그 앞에 앉은 여자관객분은 연극을 보는 게 아니라 짜증만 받고 가신 듯 하다. 어이가 없어 사람들이 계속 뒤를 돌아봤지만 그 분들은 그치지 않았고 뭐라고 말하는지 거의 다 들릴 지경이었다.
무대위의 배우들도 누가 말을 하는지, 저 분이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다.
아마 외국인인 연출자 빼고 아무도 그 분에게 항의하지 못했겠지.

당신이 만든 영화를 보고 늘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늙어지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참담한 생각을 하고 돌아왔다.
정중하게 사과하시고 그 앞자리 여자분 표 물어주시면 참 좋겠다.

2011. 9. 20. 관람.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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